‘虛榮이라는 이름의 나라 病’(2)
‘여기가 어디인지’ 묻는 게 지정학적 사고라면 ‘지금이 어느 때인지’ 묻는 것은 역사의 무게와 두께를 느끼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국가의 현 단계와 국력(國力)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가능해진다. 이 진단이 정확해야 국가 자원을 시급성과 중요성에 따라 효율적으로 배분할 수 있다. 1960년대 일본은 과거 식민지와 피(被)침략 아시아 여러 나라에 배상금 또는 청구권 자금 명목으로 수십억 달러를 제공했다. 그 돈이 경제 부흥의 종잣돈 구실을 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경부고속도로·포항제철 등이 그 흔적이다.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은 일본 배상금으로 거대한 운동경기장과 호텔을 지었다. 필리핀·미얀마도 인도네시아와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지도자의 판단 차이가 이런 엄청난 결과를 만든다.
나라가 앓는 마음의 병 가운데 오만(傲慢)과 허영(虛榮)만큼 무서운 게 없다. 오만과 허영은 비슷한 말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병이다. 오만은 남의 눈길에 신경 쓰지 않는다. 추격자·경쟁자의 동향에도 무심해 그들의 다급한 발소리를 듣지 못한다. 패권(覇權) 국가가 걸리기 쉬운 일류병(一流病)이다. 이 병에 걸리면 머지않아 선두 자리를 경쟁자에게 내주는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반면 허영은 어떻게든 남의 눈길을 끌려고 하는 병이다. 작은 성공에 들떠 우쭐대는 2류·3류 국가가 이 유혹에 약하다. 서둘러야 할 일은 뒤로 미루면서 체면치레용으로 국가 능력에 부치는 일에 에너지를 소모한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하산(下山)한 나라는 대부분 허영의 희생자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UN 기후 총회에서 2030년 탄소 감축 목표를 독일·일본보다 높은 40%로 제시해 큰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원전을 축소하면서 2050년엔 탄소 중립을 이루겠다고도 선언했다. 박수를 보낸 선진국 정상들이 한국 목표가 비현실적이며 어마어마한 희생이 뒤따를 거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대통령 약속을 이행하려면 천문학적 비용이 든다. 대통령이 박수 한번 받는 대가(代價)를 기업들이 치르게 된다. 응급실에 실려갈 기업이 수두룩할 것이다. 원전과 탄소 배출 축소 목표의 관계는 어느 프랑스 장관 말대로 ‘이념 문제가 아니라 (더하고 빼는 단순) 수학 문제’다. 허영은 지도자의 덧셈 뺄셈 능력까지 마비시킨다.
그림자가 길어지면 해가 서산(西山)에 걸렸다는 뜻이다. 문재인 시대의 그늘이 한꺼번에 밀려들고 있다. 다음 대통령 선거는 ‘허영의 시대’ 연장이냐 단절이냐 사이의 선택이 돼야 한다.
칼럼 강천석 논설고문 입력 2021.11.13 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