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진정한 선진국의 조건(1)

3406 2022. 2. 16. 12:31

프랑스 바칼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에선 철학과 역사가 필수 과목이다. 학생들은 이 논술시험을 통해 프랑스 시민이 가져야 할 가치관과 판단력을 키운다. 바칼로레아가 프랑스인의 지성을 가늠하는 잣대로 인식되는 이유다. 극심한 이념 갈등을 겪었던 독일은 1976년 좌우 진영의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통해 정치교육 지침을 마련했다. 교사의 강압적인 주입식 교육을 금지하고 분별력 있는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게 지향점이다. 독일 학생들은 타인을 이해하고 타협할 줄 아는 유연성을 기르게 된다.

 

우리 청소년들의 학습 능력은 최고 수준이지만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1점이라도 더 받으려는 입시 경쟁 속에서 체육·예술·전인교육은 뒷전이 된 지 오래다. 학교 수업보다 학원 수업을 맹종하는 '대치동 신드롬'은 아이들에게 삶의 지혜와 가치판단의 틀을 이식시켜주지 못한다. 성적만으로 승리자와 패배자가 결정되고,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가 난무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한국의 사회적자본지수는 32위, 국가갈등지수는 28위로 하위권이다. 한국이 막대한 갈등 비용을 치르고 있다는 건 국민 대다수가 인식하는 사실이다. 정치권의 극단적 진영 논리는 말할 것도 없고 기업 노사갈등과 국책사업 주민 반발로 각종 사업이 발목 잡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얼마 전 만난 발전공기업 대표는 "주민 보상 비용이 너무 커 신재생발전 용지를 찾는 데 애를 먹고 있다"고 토로했다. 자기 노조원을 채용하라면서 건설현장 입구를 막고 공사방해 집회를 일삼는 노노갈등도 안타까운 단면이다.

 

한국인이 결코 열등해서가 아니다. 치열한 경쟁과 압축 성장에 내몰리면서 갈등을 푸는 능력을 쌓지 못했다. 타협을 끌어내는 통 큰 리더십도 찾아보기 힘들다. 미래 세대라도 희망이 있으면 좋겠는데 학교의 전인교육은 요원하고 코로나 팬데믹(대유행)까지 겹쳐 공동체 의식을 기를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다.

매일경제 황인혁 경제부장  2022.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