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의 비극... “인권 탄압은 70년 전 일”이라는 野
이하원 논설위원
1912년 중화민국 총통이 된 위안스카이가 티베트 공격을 명령했다. 티베트는 19세기 말부터 청나라가 힘을 잃자 중국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티베트에 지분을 갖고 있던 영국이 “위안스카이 정부를 불인정하겠다”며 가로막았다. 영국의 개입으로 티베트군은 라싸를 지킬 수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티베트를 차지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은 1950년 새해가 밝자마자 인민해방군에 지시했다. “티베트는 지리적으로 중요하니 반드시 점령하라.” 수만명 규모의 ‘점령군’이 편성돼 공격했다. 브래드 피트가 출연한 ‘티베트에서의 7년’은 중국의 티베트 침공을 묘사했다. ‘티베트 평화해방 협의’라는 이름으로 티베트를 압박, 합병하는 길로 몰아갔다. 1959년 티베트인들이 독립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중국은 1만명 이상 학살한 후 사흘간 시체를 불태웠다.
▶티베트의 원래 면적은 한반도의 10배가 넘는다. ‘세계의 용마루’로 불리는 고도 4000m의 고원에 철, 금강석, 마그네슘 등 70종이 넘는 지하자원이 매장돼 있다. 중국 입장에서 인도와의 완충 지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티베트의 기원인 토번 제국은 실크로드를 장악, 정복전쟁에 나설 정도로 강력했다. 당나라는 토번 제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구려 유민 출신의 고선지 장군을 투입했으나 실패하기도 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따르면, 청나라 건륭제가 티베트의 2인자 판첸라마에게 예를 갖춰 대하며 조선의 사신들에게 소개할 정도로 정치적 위상도 낮지 않았다.
▶중국이 합병한 티베트는 마치 사지가 찢긴 것과 같다. 티베트의 북부 지역은 칭하이성으로, 동부는 윈난성·쓰촨성으로 편입됐다. 한족을 대량으로 이주시키고 ‘애국주의 교육’이라며 중국 역사 위주로 가르친다. 티베트의 독립을 외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 분신한 티베트인이 200명에 이른다는 말도 있다. 국제사회에서 티베트는 신장 위구르, 홍콩과 함께 중국 인권 문제의 핵심으로 거론된다. 지난달 히로시마 G7 성명에서도 티베트 인권 문제가 지적됐다. EU는 지난 2월 중국과의 인권 대화에서 티베트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민주당 의원들이 중국의 초청을 받아 티베트를 다녀왔다. 그들은 티베트 인권 문제에 대한 질문에 “티베트의 인권 탄압은 70년 전”이라고 한다. 약소국의 독립과 주권, 약자의 인권은 진보 이념의 핵심에 해당하는 가치다. 민주당은 말로라도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이다. 그런 정당이 공산 강대국이 약소국의 독립과 인권을 말살하는 데 영합하고 있다.
[만물상] 이하원 논설위원 may2@chosun.com23.06.20. 오피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