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과 청빈, 어떻게 살 것인가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탐욕의 시대다. 주식과 부동산 시장이 다소 들썩이는 기미가 보이자마자 일확천금을 노리고 투자에 뛰어드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리는 중이다. 전세 사기에 분노하고, ‘영끌’의 비극을 경계하던 외침은 어느새 잊힌 듯하다. 사람들은 건망증 환자처럼 마음 졸이던 어제를 잊은 채 또다시 대박을 노리고 가상화폐 같은 투기성 시장에 달라붙는다.
일찍이 프랭크 파트노이 미국 샌디에이고대 교수는 탐욕의 현대적 작동 원리를 베팅이라고 했다. 모든 투자엔 도박적 성격이 있으나 그 기댓값이 도박장 ‘잭팟’과 비슷해지면 상식적 경고도 무시하게 된다. 탐욕은 인간을 돈과 소유에 중독 시켜서 눈멀고 귀먹게 한다. 사기꾼들은 그 흐릿한 정신과 성긴 마음을 교묘히 파고들어 달콤한 말로써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성서에서 탐욕을 뜻하는 단어 ‘굴라(Gula)’는 본래 식탐이란 뜻이다. 더 좋은 것을 먹고, 더 좋은 것을 입고, 더 좋은 집에서 살려는 욕망이 탐욕을 부른다. 미식 열풍이 불고, ‘먹방’이 인기를 끄는 사회는 그 자체로 인간 위기의 징후일 수 있다. 물질적 부나 지위와 관련해 필요 이상의 것을 얻거나 소유하려는 욕망을 일으키는 까닭이다.
일찍이 예수는 경계했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라. 사람이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그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물질의 보물을 추구하다 보면 삶에서 정작 챙겨야 할 영혼의 보물을 놓치기 쉽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탐욕을 멀리하는 삶, 즉 자발적 청빈을 강조한 이유일 테다.
탐욕이 한 시대의 정신이 된 문명은 모두 몰락했다. 탐욕은 인간 사회의 균형을 깨뜨리는 흉기이고, 삶의 안정을 파괴하는 지름길이다. 프랑스의 위대한 풍자시인 페르 카르드날은 경고했다. “탐욕이 가죽을 벗기고, 털을 깎고, 약탈하고, 고발하고, 교수형을 집행한다.” 권력을 쥔 자가 부자도 되려고 날뛰는 나라는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들이 돈을 신으로 섬기면 말똥가리나 독수리가 썩은 시체 냄새를 맡는 것보다 돈 냄새를 더 잘 맡기 때문이다.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 자들이 법의 이름으로 탐욕을 부리고 세상을 농단할 때 민중들의 삶은 지옥으로 변한다. “가난한 자가 말굴레 하나를 훔쳤을 때/ 짐말을 훔친 자가 그를 심판해 교수형에 처하는구나.” 이들의 탐욕은 약자를 억압하고 공정을 파괴하며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한다. “그들은 그들 것도 가지고 내 것도 가진다.” 권력과 그 가족이 성실한 노동을 통한 일이 아니라 코인 같은 투기성 상품들에 연루되는 사태를 사람들이 심각하게 여기는 이유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권력은 그 자리를 누릴 자격이 없다.
탐욕의 대척점에 있는 가치가 자발적 가난을 누리는 청빈이다. 미국의 노동운동가이자 생태운동가인 도로시 데이는 인간을 결핍의 희생자로 만드는 빈곤과 인간을 행복의 정복자로 만드는 거룩한 가난을 구별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부자 되기’를 지나치게 강요하나, 인류의 오랜 지혜가 알려주듯, 일정 수준을 넘으면 부유함은 물질의 풍요가 아니라 마음의 만족에 달려 있다.
만족할 줄 아는 삶은 행복이 된다. 끝없이 더 많은 것을 갈망하는 탐욕은 인간을 영원히 불행하게 만든다. 베팅에 내던진 몸이 혹여 운을 얻을지라도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가려움증, 전신을 짓누르는 부자 되고 싶은 목마름”(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은 절대 가시지 않는다.
탐욕은 우리 삶을 실패로 몰아가는 가장 큰 요인이다. 풍자시인 카르드날은 말한다. “사람이 죽을 때/ 가져가는 건/ 재물도 장신구도 아니고/ 오로지 자신이 한 행동뿐일세.” 연민을 품고 남에게 베풀고, 해악과 탐욕을 버리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삶만이 인간을 구원한다.
[너섬情談]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2023.06.14. 오피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