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드라이브의 전제는 추진 주체와 청산 대상이라는 선명한 양자 구도다. 개혁 주체는 ‘선(善)’이고, 개혁 대상은 ‘악(惡)’이 되는 식이다. 그러나 이 정권에선 개혁 주체가 불가침의 성역으로 남았다. 생각이 조금이라도 다르거나, 정권 비리를 문제 삼으면 개혁 대상이 됐다. 오죽하면 같은 정부의 경제부총리도 곳간 사정을 호소했다는 이유로 ‘개혁 대상’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을까. 상대에겐 너무나 가혹하고, 자신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고무줄 잣대이다 보니 적과 동지라는 프레임만 앙상하게 남았다. 엄정한 개혁의 대의는 실종됐고, 정치적 유불리만 따지는 ‘선택적 개혁’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 집권한 볼셰비키들은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지만 제국주의 열강들이 러시아를 포위하고 있다고 봤다. 이런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민주주의는 포기할 수 있다고 했다. ‘포위된 요새’인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 언론 자유를 제한할 수 있고, 사소한 잘못이나 거짓말 정도는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스탈린 독재에 명분을 제공해준 ‘포위된 요새’ 신드롬이다. 100년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민주화 세력, 정의의 구현자라는 선민의식으로 무장한 친문 세력의 심리적 기저에도 이런 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다. 친문 세력이 내건 개혁과 정의가 절대적인 데 비하면 절차나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사소한 곁가지일 뿐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친문 세력은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약자가 아니다. 청와대는 물론 국회 의석을 압도적으로 장악해서 개헌을 제외하면 웬만한 입법은 일방 독주하고 있다. 사법부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엄연한 기득권 세력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들은 검찰과 법원 등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기득권 세력에 포위되어 있는 것처럼 행동하려 한다. 친문 세력이 주도하는 개혁 드라이브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계산이겠지만 지나친 현실 왜곡이다. 이럴수록 개혁의 대의나 명분은 빛이 바랠 것이다. 친문 세력만의 개혁이나 정의를 외칠 때가 아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기준과 잣대로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어떤 개혁도 표류할 수밖에 없다.
<정연욱 논설위원 입력 2021-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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