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젊은 인재가 떠나는 나라

3406 2021. 3. 27. 11:07

파리에서 쭉 알고 지낸 프랑스인 사업가의 초대를 받았다.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다가 미국·영국·독일은 백신 개발에 성공했고, 프랑스는 실패했다는 대화가 흘렀다. 그는 “그거 아느냐. (미국의) 모더나와 (영국의) 아스트라제네카는 CEO가 둘 다 프랑스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게라도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하는 듯했다.

 

프랑스는 인재 유출이 위험 수위다. 런던과 근교에는 프랑스인이 적어도 25만명 살고 있는데, 학력·소득 수준이 높은 이가 많다. 런던의 부촌(富村) 사우스켄싱턴에 ‘샤를 드골’이라는 프랑스 학교가 있을 정도다. 나폴레옹 가문의 대표를 맡고 있는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마저도 ‘런던의 프랑스인’이다. 파리에서 쭉 자랐지만 하버드대 MBA(경영학 석사) 유학을 마친 후 런던의 사모펀드에 취직해 돌아오지 않고 있다.

 

젊은 인재에게 프랑스는 답답하다. 일처리가 느리고 규제가 첩첩이 쌓여있다. 공무원이 워낙 많은 탓이 크다. 사회주의 전통의 영향으로 자본이 꽃피는 걸 거북해하는 이도 제법 많다. 백신을 성공시킨 제약사 CEO 두 사람은 이런 장애물을 피해 해외로 나간 대표 사례다.

모더나 CEO 스테판 방셀이 24세에 해외로 떠나 올해 49세가 될 때까지 고국 프랑스에 머무른 건 4년뿐이다. 그는 5조원대의 모더나 지분을 가진 거부(巨富)가 됐다. 프랑스에서는 꿈꾸기 어려운 규모의 성공이다. 아스트라제네카 CEO 파스칼 소리오도 마찬가지다. 1986년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호주, 일본, 미국의 제약 업계에서 성장하는 동안 프랑스를 계속 떠나 있었다. 소리오는 호주가 살기 좋다며 아예 호주 국적을 얻었다.

 

요즘엔 프랑스 상류층 부모들도 자식을 영미권으로 보내려고 한다. 특히 10대를 파리에서 보낸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졸업한 이중언어학교에 자녀를 진학시키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영어·불어를 병행해 수업하는 이 학교를 거쳐 영미권 명문대에 보내거나 영어 능통자로 만들고 싶어한다.

 

각국의 능력 있는 젊은이에게 국경 문턱이 낮아지고 있다. 한국 젊은이들도 외국에서 점점 기회를 많이 잡고 있다. 프랑스·남아공처럼 인재가 유출된 이후 손가락 빠는 처지가 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 갇히기 싫어 떠난 인재가 해외에서 성공할 때 ‘저 사람은 한국인’이라며 뒤늦게 떠드는 건 허망한 일이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21.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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