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한국에 '12사도'를 자칭하는 경제학자들이 있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설립되던 1971년 3월 이야기다. 현대 경제학을 외국에서 배워와 가르치던 대학 교수가 나라 전체적으로 5명 정도이던 시절이다. 머지않아 미국이 경제 원조와 지식 원조를 중단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 때였다. 독자적인 경제 연구 역량이 필요했던 정부는 세계 각지에서 한국인 경제학 박사 12명을 모셔와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KDI 수석연구원의 최고 1호봉 월급은 국립대 교수의 4배로 책정됐다. 장관급 공무원만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승용차가 귀하던 시절이었지만 출퇴근용 자동차를 배정했다. 서울 반포의 새 아파트를 무상 임대해주기도 했다.
최신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그들의 사명감도 대단했다. 김만제 초대 원장을 비롯한 그들은 스스로 '12사도'라고 부르며 경제 지식 전파를 다짐했다. 그해 6월 내놓은 제1호 연구보고서가 '기업 정리에 대한 의견'이었다. 그 당시 부실화된 기업 중 상당수는 정치적 뒷배경을 지니고 있어 함부로 건들 수 없었지만 KDI는 눈치 보지 않았다. '곪은 상처는 도려내야 새살이 돋는다'고 가차 없이 주장했다.
독립성과 자율성은 KDI를 설립할 때 '세계 최고의 인재를 확보해야 한다'는 원칙 못지않게 강조됐다. '관청을 위해 어용 연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도 분명했다. KDI가 경제기획원 산하 연구소가 아니라 인사·자금이 독립된 재단법인으로 출범한 배경이다. 그 후 KDI는 미국의 무상 원조 중단, 1972년 8·3 사채 동결 조치, 1973년 중화학공업 선언, 1차·2차 석유파동 등으로 한국 경제가 질풍노도에 휘말릴 때마다 독창적인 해법과 비전을 제시해 왔다. 정부에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물가 대책과 노동 정책을 놓고는 1970년대부터 정부에 꿋꿋하게 반대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매일경제 [최경선 논설실장] 2021.04.15.>
'실로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 오는 날, 프랑스의 길거리 (0) | 2021.04.21 |
---|---|
한국경제 '12사도'가 혀를 찰 일 (2) (0) | 2021.04.20 |
탈원전의 역설? 美뉴욕 (0) | 2021.04.20 |
英-獨-스위스 등 입법영향분석제도 시행 (0) | 2021.04.19 |
손흥민은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0) | 2021.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