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병일 플루토미디어 대표
이달 초 영국 BBC 프로그램의 한 진행자가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현지의 자사 특파원과 대담을 가졌다. 장소는 시민들로 북적이는 키이우의 한 카페. 얼핏 보면 젊은이들로 꽉 찬 서울의 여느 카페와 다르지 않은 분위기였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그 특파원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은 오래 갈 것 같다. 우크라이나인들의 러시아에 대한 항전 의지는 단호하다(determined)…."
한때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이었고, 현재 러시아의 침공을 받고 자유민주진영의 군사동맹인 나토 가입을 추진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국가 미래전략을 구상하고 있을까, 키이우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궁금했다. 지금 유럽은 '전쟁 중'이다. 우크라이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영국 프랑스 등도 러시아에 굴복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폴란드 같은 인접 국가들은 "다음 침략 대상은 우리"라며 무기를 준비하고 있다. 우-러 전쟁은 국제 정치경제 질서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2차 대전 전후 국제정치 질서도, 지난 30여 년을 풍미한 세계화 자유화라는 경제 분업구조도 사실상 무너져가고 있다.
이런 격변기에는 역사가 많은 걸 가르쳐준다. 우리도 그렇다. 돌아보면, "안타깝다!" 싶은 때가 있고 "천운이다!" 싶은 때가 있다. 현 '대한민국 전성기'는 그 '천운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결과라는 생각이 요즘 특히 부쩍 든다. 북한의 남침에 UN이 참전한 것도, 종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은 것도, 미국의 시장개방이라는 기회를 활용해 경제성장을 이룬 것도 돌아보면 다 '천운'이었다. 천운이라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현명한 결정을 한 리더와 그 리더를 선택했던 그 세대 국민 덕분임은 물론이다.
지난 일 중에는 "큰일 날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경우도 있다. '한-북-러 가스관 프로젝트'가 그런 케이스다. 문재인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했지만 북한의 무응답 등으로 진전을 보지 못했던 이 정책은 지금 돌아보면 무산된 것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결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과오다.
그런데 이미 전쟁 중인 유럽과는 달리 한국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 걸까. 아직 일부 정치권과 기업들이 지금의 지정학적 지각변동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야당의 대표는 한미일 동해 연합훈련을 비난하면서 "극단적인 친일 국방"이라며 북핵 대책 대신 반일을 끌어들였다. 한국을 공격하는 핵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정보공유가 필요하고, 북한 남침 시 반격할 미군의 해·공군과 병참기지가 있는 일본이 미국과 더불어 우리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는 현실은 무시한다.
정부와 여당은 기본적인 방향은 잘 잡은 듯 보이지만, 구체적인 사안들로 들어가면 펠로시 미 하원의장 방한 케이스 등 여전히 애매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기업들도 중국시장 위축 등 단기적인 이익 감소를 우려해 서방세계의 신질서 동참을 주저주저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국제질서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국가전략을 수립하고, 치명적인 과오는 범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제 군사·외교·경제 등 국가의 모든 분야에서 국가전략의 기본 프레임을 재설정해야 한다. 국방과 외교는 한미동맹 강화와 한미일 공조 정립을 기본 프레임으로 냉전과 북핵위기에 대응하고, 경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구축되고 있는 국제경제체제에의 적극적 주도적 참여를 기본 틀로 새로운 번영의 기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기업들도 주도적으로 미국, 유럽, 일본과 함께 하는 새로운 생산-소비 시스템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새 질서 속에서 중장기적인 퀀텀점프를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 진영 간 전쟁이 현실화한 신 냉전과 대립의 시대에서 생존할 수 있고, 경제블록화 구조에서도 지금의 번영을 유지할 수 있다.
러시아의 공습 속에서 국가전략을 고심하고 있을 우크라이나인들을 보며,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국제정치경제 질서 속에 존재했던 '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현명한 국가전략을 통해 한국을 최빈국에서 경공업을 거쳐 조선 철강 자동차는 물론 반도체 2차 전지 군수산업 등을 갖춘 세계 10대 강국으로 일으켰던 앞 세대 한국인들을 떠올리며,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새로운 미래 국가전략을 준비하고 있는가.
디지털타임스 [예병일 칼럼] 2022.10.17 오피니언
'실로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간절히 원하면 (0) | 2022.10.31 |
---|---|
좋은 습관 (0) | 2022.10.31 |
소아마비 육상선수 루돌프 (0) | 2022.10.29 |
짧은 다리의 금메달리스트 조아큄 크루즈 (0) | 2022.10.29 |
좋은 ‘재상’ 얻으려면 ‘임금’부터 달라져야 (0) | 2022.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