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좌도 우도 “퇴계는 선생님”

3406 2023. 4. 18. 10:19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호남의 식자층이 영남이 가진 깊은 정서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 바로 퇴계학(退溪學)의 영향이다. 영남의 상류층 양반 집안. 대략 50여 집안으로 필자는 추정하고 있는데, 이 집안들이 수백 년 동안 퇴계학의 영향권 내에서 살아왔다는 점이다. 이 50여 집안은 학연으로 엮여 있고, 혼사로 결합되어 있고, 고향이 같다는 지연으로 연결된다. 이것이 연비(聯臂)이다. 호남에 비해서 영남은 퇴계학파의 연비가 아직도 작동되고 있다. 그래서 개인 플레이 하기가 어렵다. 돌발 행동을 하면 집안 전체에 누를 끼치기 때문이다.

 

해방 전후사에서 퇴계학파 내에서도 좌·우익이 갈렸다. 선비정신과 코뮤니즘이 서로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좌익을 많이 했다. 안동 풍산 김씨, 고려공산당 초대 책임자가 풍산 김씨 김재봉이었다. 가일 권씨의 권오설, 무실 유씨 유연화, 광산 김씨 김남수 등이 거물급 좌익이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아무리 좌·우익으로 갈렸더라도 퇴계학을 갖다가 들이대면 양쪽 모두 조용해졌다는 점이다. 좌·우익 모두 퇴계 선생에 대해서는 토를 달 수 없고 뿌리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 정신으로는 서로가 소통되는 같은 퇴계학파였다. 퇴계가 남긴 일상에서의 처신, 그 인품의 향기가 경북 지역의 선비 집안에 깊게 각인된 결과였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 주장을 양보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지 못하는 것이 학자들의 큰 병통이다(不能捨己從人 學者之大病). 천하에 옳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데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할 수 있겠느냐!(天下之義理無窮 豈可是己而非人)”

 

논쟁을 했던 고봉 기대승은 퇴계를 선생님으로 모셨고, 퇴계는 25년 연하의 고봉을 존중했다. 선조 임금에게도 고봉을 인재로 추천하였다. 사단칠정 논쟁 결과는 사우(師友)관계가 되었다는 것이 고려대 김언종 교수의 설명이다. 고봉은 퇴계를 선생님으로 모셨고, 퇴계는 고봉을 친구로 대했다.

 

가뭄이 들어서 10리 밖에서 끌어오는 시냇물을 가지고 논에 물을 대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퇴계는 “이것은 우리 논이 그 위에(좋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마른 밭이라도 먹고살 수 있지만 저들은 논을 적셔주지 않으면 먹고살 수가 없다.” 퇴계는 당장 당신 소유의 논을 밭으로 바꿔 버렸다. 퇴계 선생의 인격이 이러했으니 주변 지역에서 감화를 받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 향기가 지금까지 영남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조용헌 살롱] [1390] 전문가칼럼 23.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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