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크리스마스의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3406 2023. 12. 26. 10:21

송혜진 기자

 

“제겐 크리스마스의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수화기 너머 그의 단정한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성탄절을 앞두고 제보 몇 건을 받았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회사에서 오래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는 피해자들의 사연이었다. 국내 대기업에서 일하는 이도 있었고, 유명 글로벌 기업 직원도 있었다. 이들 사연을 취재하면서 종종 가슴이 갑갑했고, 또 먹먹했다. 피해자들이 자신이 피해자임을 입증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금 깨달아서였다.

 

 

한 대기업 팀장은 지난 2년 동안 매일 일기를 썼다. 직속 상사에게 매일 오전 6시부터 밤 11시까지 텔레그램으로 폭언 섞인 문자를 받으면서부터였다. ‘네 목 위에 있는 게 머리 맞냐’ ‘변기에 대고 얘기해도 너랑 얘기하는 것보단 시원하겠다’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아침이고 밤이고 날아들었고, 그때마다 A씨는 ‘나는 정말 그토록 무능한가’ ‘살아 있는 게 의미 있나’라고 자문했다고 한다. 참고 견디다 고용노동부에 신고했지만 회사는 가해자를 징계하는 대신 피해자를 다른 부서로 옮기려 했고, 그는 사표를 썼다.

 

상황을 뒤집은 건 동료들이다. “부끄러운 선례를 남길 순 없다”고 동료들이 항의했고 결국 가해자가 부서를 옮기게 됐다. A씨는 “전 정말 운이 좋은 경우임을 안다”고 말했다. “증언해줄 동료 한 명이 없어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 못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알거든요....” 그가 다시 울먹였다.

 

작년 12월부터 올해 7월까지 유명 글로벌 시계 S그룹에서 일했던 B씨는 반면 아직 힘겨운 싸움 중이다. 그는 이 회사에서 7개월가량 시계 테크니션으로 근무하며 고객이 본사에 시계 수리를 맡기면 이를 조사하고 견적을 내는 일을 맡아왔다. 입사 초기부터 그는 직속 상사인 부장에게 끊임없는 괴롭힘과 언어폭력에 시달렸다. 부장은 고객이 무상 수리 보증 기간에 시계 수리를 신청하면 B씨에게 “이런 (돈이 안 되는) 것은 그냥 돌려보내라”고 했고, 고급 쿼츠 시계 수리가 들어오면 배터리만 교체해도 될 시계를 놓고 “전체 부품 교체 수리로 다 바꾸라”고 했다고도 했다. 이 경우엔 고객이 수리비용을 받아들이면 내야 할 돈이 5만원에서 95만원으로 불어났다. B씨가 이를 거부하면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호통 쳤고, 나중엔 화장실 다녀오는 횟수까지 제한하며 괴롭혔다. B씨는 부장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했지만 회사는 이를 받아 들어주지 않았다. 관할 노동지청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노동청은 “사내 조사가 미흡한 것은 맞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B씨는 “1차 조사에서 사측이 일을 키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대충 덮으면 이를 뒤집을 방법은 별로 없다”고 했다.

 

 

 

2019년 7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시행된 지 4년 5개월. 그러나 여전히 객관적 증거나 증언을 찾는 건 피해자의 몫이다. 회사에 입사하는 순간부터 상사에게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매일 사진을 찍고 녹음하고 다닐 직원이 대체 몇이나 될까. 실제로 지난 4년 동안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신고 3만843건 중 괴롭힘으로 인정받은 경우는 12.8%, 검찰 송치·기소까지 이어진 경우는 0.7%에 불과하다.

 

그래도 A씨 사례를 보면서 희망을 품어본다. 한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은 말했다. “물론 직장 내 괴롭힘을 제대로 조사하긴 쉽지 않아요. 그렇지만 성범죄 피해도 예전엔 신고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고 눈총 받을 일이었지만 이젠 아니잖아요. 사회는 계속 바뀔 겁니다.”

 

기도한다. 오늘 크리스마스 기적이 내일은 당연해지길. A의 기적이 언젠간 일상이 되길.

[에스프레소] 송혜진 기자 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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