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광장, 공간에서 장소로

3406 2021. 3. 15. 09:43

루이15세 광장~혁명광장~루이15세 광장~루이16세 광장~헌장(charte)광장~콩코르드광장. 프랑스의 수도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서쪽 시작점에 있는 콩코르드광장은 명칭이 무려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왕정과 공화정, 혁명과 왕정복고의 숨 가쁜 교체 과정에서 광장의 운명도 조각품들과 함께 갈렸다. 혁명 당시에는 단두대가 설치되어 루이16세와 앙투아네트 왕비의 목이 잘리기도 했다. 23년 전 바로 그들의 결혼 축하 행사가 열렸던 곳이었다.

 

1830년 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그동안 광장에 뿌려진 피를 씻어내고 화합을 기원하는 의미로 콩코르드라는 현재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매년 혁명 기념일이면 개선문을 출발한 군사 행렬이 샹젤리제 거리를 거쳐 이곳에 마련된 사열대로 향하고 공화국의 대통령은 초청 귀빈들과 함께 피의 대가로 얻은 혁명을 기린다. 관광객들이 루브르박물관을 관람한 뒤에 튈르리 공원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 만나게 되는 이곳에는 프랑스 혁명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콩코르드광장은 ‘공간’이 어떻게 ‘장소’가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공간이 물리적 개념이라면, 장소는 문화적 개념이다. 일정한 물리적 공간인 장소가 역사적·문화적 의미를 획득할 때 장소가 된다. 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장소는 의미가 체계적으로 조직된 세계”(『공간과 장소』)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공간은 우리를 움직이게 만들지만 장소는 우리를 머무르게 한다고 그는 덧붙인다.

 

물리적 공간에 일정한 사건이 일어나서 의미가 발생할 때 공간은 장소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곳이 누구에게는 그냥 평범한 공간이지만 어떤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 소중한 사람과의 인연이 서려 있는 곳, 그런 곳은 모두 우리 삶에서 소중한 장소인 것이다.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에도 장소는 중요하다. 공동체의 기억이 서려 있는 곳은 공동체의 장소가 된다. 광장은 그 대표적인 곳이다. (하략)

<최범 디자인 평론가 중앙일보 2021.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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