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워싱턴 분위기는 단계적 접근 쪽이다. 주요 싱크탱크에서는 단계적 접근으로 가야 한다는 글이 쏟아진다. 실제로 북한이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쏜 지난 25일 '포린 어페어스'에는 '지금은 북한과 현실적인 협상이 필요한 시점'이란 제목의 글이 실렸다. "이제 비핵화는 불가능해졌으니 핵 위협 축소로 돌라"는 게 핵심 내용이었다.
'최대 압박 2.0'이 안 통할 걸로 보는 이유는 셋이다. 첫째, 아무리 조여도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없다는 거다. 혹독한 시련 끝에 핵을 마련한 북한이다. 웬만한 제재로는 끄떡도 안 할 게 뻔하다. 둘째, 압박 정책이 작동하려면 대부분의 필수 물자를 대온 중국이 협조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악화한 미·중 관계로 중국이 힘을 보탤 가능성은 적다. 끝으로, 어떻게든 남북 교류의 물꼬를 터보려는 문재인 정부의 존재 역시 압박 정책을 어렵게 한다.
결국 핵 동결 및 상징적 수준의 핵 폐기와 제재 완화를 맞바꾸면서 대화를 이어가는 단계적 접근법이 대북정책 기조로 채택될 공산이 크다. 이럴 경우 가장 큰 문제는 '완전한 북한 비핵화'가 물거품이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과 일본의 여론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게 미국의 고민이다. 당장 "독자 핵무장으로 가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올 게 뻔하다. 이 때문에 "미국은 단계적 접근을 천명하면서도 '장기적으로 완전한 북한 비핵화를 추구한다'는 단서를 붙일 공산이 크다"는 게 로버트 아인혼 전 미 국무부 특별보좌관의 진단이다.
경제학자들 사이엔 우스개 같은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경제 예측을 할 때 구체적 시기를 못 박지 말라"는 거다. 언제인지 확실히 밝히지 않은 채 "장기적으로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고 하면 하나 마나 한 얘기이면서도 틀릴 리 없는 진단이 된다. 이렇듯 "장기적으로 북한 비핵화를 이루겠다"는 건 사실상 포기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미국 입장에선 단계적 접근법이 현실적 방안일 수 있다. 문제는 한국이다. 이대로면 핵보유국 북한의 정상국가화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1980년대 말 동유럽 공산권의 몰락을 지켜본 미국은 중국 역시 시장경제를 도입하면 중산층이 생겨나 결국은 민주화될 것으로 믿었다. 햇볕정책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보라. 지금의 중국이 어떤지. 북한도 중국의 길을 걷는다면 앞으로 더욱 강력한 김정은 독재 치하의 핵보유국으로 남을 가능성이 있다.
나라의 안보는 강철 같은 국방력, 아니면 동맹의 힘을 토대로 지키는 게 원칙이다. 지금은 한·미 동맹을 기초로 한 '핵 확장 억제'가 최선의 방어책으로 돼 있다. 하지만 매년 열기로 했던 고위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 회의조차 3년 넘게 감감무소식인 터라 여기에만 목을 맬 수도 없다. 그러니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처럼 핵무기 운용을 한·미가 함께 하는 '아시아판 핵 계획 그룹(ANPG)'을 만들든, 전술핵무기를 한반도 인근에 배치하든 보다 강력한 대응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도 안 된다면 독자적 핵무장을 포함, 북핵 위협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낼 최후의 보루를 찾아야 한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 2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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