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대통령,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치학’ 못 깨치나

3406 2021. 5. 26. 09:50

 

(전략) 대통령은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생각과 자세를 갖춰야 한다. 대통령의 성패(成敗)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얼마나 적절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사용해 잘못된 정책을 버릴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문 대통령 전임자들은 대부분 과거의 잘못된 정책을 버리는 정책 전환을 결단(決斷)함으로써 업적을 남겼다.

 

40대의 박정희 대통령 생각 바탕에는 상당한 좌파적 사고가 깔려있었다. 1960년대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쥔 제3세계 지도자 대부분이 그랬다. 그들은 과거에 수입하던 제품을 국내에서 생산하는 수입 대체 산업 육성을 경제 정책의 제1 목표로 삼았다. 박 대통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달리 수출 주도(主導) 경제성장으로 정책 전환에 도전했고 이것이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다. 건강보험 도입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소산(所産)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국회의원 시절 한·일 국교 정상화에 앞장서 반대했다. 대통령 김대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 대중문화 상호 개방 정책을 결단하고 지지 세력을 설득했다. 이것이 ‘K’라는 글자를 단 한국 대중음악과 영화 산업을 세계 주류(主流)로 올려 세웠다. 한·미 FTA 체결,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도 노무현 대통령이 과거 노무현의 생각을 버리고 밀고 나갔기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극약(劇藥)이다. 소량(小量)을 적시(適時)에 사용해야 한다. 이 약을 너무 자주 쓰거나 거꾸로 쓰면 나라가 뒤집힌다. 조국씨가 정권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됐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 가족의 잘못은 그냥 넘기기 어렵다’가 바른 처방(處方)이었다. 대통령은 위법과 범법(犯法) 논란을 알면서도 그를 법무장관으로 고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거꾸로 사용한 것이다. 대통령은 ‘탄소 중립(中立) 선언’에 호응한다면서 석탄발전소 조기 폐쇄만 언급하고 원전 폐쇄는 은근슬쩍 말없이 뭉개고 지나갔다. 정직하지 못했다. 이 대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약을 삼켜 원전 폐쇄라는 잘못된 정책의 족쇄를 풀어야 했다.

 

남은 임기 1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아니다. 권력 분립(分立) 허물기, 소득주도성장, 북한에 대한 미련과 집착, 한·미 동맹과 한·중 관계 사이의 비중(比重) 설정 혼선 등 겹겹의 족쇄를 차고 걷기에는 1년도 팍팍한 세월이다. 대통령은 영영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치학’을 못 깨칠 모양이다.

강천석 논설고문 2021.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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