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추기경의 빨간 모자

3406 2022. 10. 14. 10:38

유인경 (방송인)

 

얼마 전 로마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 유흥식 추기경 서임식에 참석했던 분이 전해준 이야기를 듣고 절로 미소가 지어지며 가슴이 따뜻해졌다.

 

“추기경님은 몇 번이나 추기경직을 고사했답니다. 너무 크고 무거운 자리라는 부담감에서요.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가끔 예쁜 빨간 모자를 쓰는 것도 괜찮지 않나요?’라는 말에 마음을 바꾸었답니다.”

 

교황이 유 추기경을 유혹한(?) 빨간 모자는 추기경의 상징인 ‘비레타’란 이름의 빨간색 사각모자다. 하느님의 백성과 교회를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하고 때론 피를 흘릴 준비까지 돼 있다는 의미를 지닌단다. 그토록 깊은 의미와 엄중한 책무를 지닌 비레타를 마치 추기경이 되면 이런 멋진 모자도 쓸 수 있다고 부드럽게 전달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존경스럽다. 그런 이야기를 미소 지으며 전해주신 유흥식 추기경도 멋지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일화도 생각난다. 장관직을 제안하기 위해 어느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대신 전화를 받은 부인이 ‘남편이 지금 손주들과 동물원에 갔다’고 전하자 이렇게 말했단다.

 

“앞으로 동물원보다 더 재미있는 곳에서 일할 수 있다고 전해줘요.”

 

자신이 이끄는 내각을 동물원에 비유한 레이건 대통령은 동물원을 지휘하는 감독처럼 국민에게 즐거움을 주었고 특유의 미소와 유머로 미국인들에게 사랑받았다.

 

추기경의 권위는 비레타란 이름의 빨간 모자와 교황이 직접 서임식에서 끼워주는 추기경 반지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 게다. 지구촌 문제를 고민하고 아픔을 같이 나누며 축복의 기도를 나눌 때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대통령 역시 퇴임 후 업적을 고려하기보다 오늘 만난 국민의 손을 잡아주며 공감할 때 박수 받는다.

 

여전히 우리나라의 권력층은 엄숙·근엄·진지한 언어와 태도를 보여야 격조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은 입만 열면 ‘국민을 대변한다’ ‘국가를 위해서’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청문회 등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언행은 경박하고 심지어 무례하기 짝이 없다. 국민 혈세로 봉급을 받으면서 자료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나와 실수를 하고, 국민을 대변한다면서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일쑤다. 언젠가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왔던 한 기업인은 국회의원들 가운데 일반 회사라면 당장 사표를 받을 사람들이 많다고 한숨 쉬며 말했다.

 

공직자들이 애국 애족을 내세우며 혼자 심각한 척, 우주의 문제를 혼자 고뇌하는 척하지 말고 자신의 직이 무엇이며 맡은 일이 얼마나 국민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 성찰하고 연구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인재를 영입하거나 후원할 사람들에게도 사명의식이나 소명감을 강조하기보다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하는 일이 성공했을 때 우리 조직은 물론 세상이 조금은 더 행복하고 성장한다고 생각해봐요’라는 말로 상대의 마음을 열기를 희망한다.

 

보통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자녀들에게도 공부나 숙제 안하면 평생 거지 신세 된다는 악담과 저주보다는 “빨리 숙제 마치고 우리 맛있는 케이크 먹자. 네가 좋은 성적을 얻으면 네가 누릴 기쁨이 더 커져. 그게 스스로에게 주는 당당한 선물이야”라고 말하면 어떨까.

[생각의 숲]농민신문 유인경 (방송인) 22. 10. 07.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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