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공공기관장 사퇴 내로남불, 반복 막으려면

3406 2022. 11. 2. 11:48

유창선 시사평론가

 

정권만 바뀌면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악순환이 많지만, 공공기관장의 사퇴를 둘러싼 갈등만큼 볼썽사나운 것도 없다. 여야 불문하고 ‘내로남불’의 낯 뜨거운 광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여권세력은 문재인 정부 때 임명된 공공기관장 사퇴를 압박해왔다. 정권교체가 됐으니 새 정부의 철학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기관장을 맡아야 하는데, ‘문재인 사람’들이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으니 윤석열 정부의 성난 목소리만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여권이 할 수 있는 방법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된 환경공단 상임감사를 사퇴시키려고 표적 감사를 지시한 문재인 정부의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징역형을 선고받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권남용의 법적 책임이 따르지 않을 범위에서의 감찰이나 감사를 통해 사퇴를 우회적으로 압박하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다. 감사원이 국민권익위원회에 대한 고강도 감사를 했던 것도 사퇴를 거부하는 전현희 위원장을 겨냥한 압박이었음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결국 문재인 정부 때 임명된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려고 약점과 허물을 캐는 방식이 되니 그 모양이 치졸할 수밖에 없다. 김제남 한국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을 향해 "혀 깨물고 죽어야 한다"고 했다가 논란을 빚은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의 발언도 그 과정에서 나온 품격 잃은 표현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정부와 여당의 그런 압박에 대해 ‘찍어내기’라며 목소리를 높여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불과 5년 전에 민주당 정부가 했던 일을 돌아보면 그럴 자격은 없어 보인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됐던 공공기관장 가운데 49%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교체됐다. 물론 그 과정에는 이전 정부가 임명한 기관장들을 사퇴시키려는 각종 압박이 있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고대영 KBS, 김장겸 MBC 사장의 사퇴까지도 요구했다. 지금 여당보다 더 심하게 했던 민주당이 이제 야당이 되니까 사퇴 압박 하지 말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또 하나의 내로남불이다.

 

게다가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유죄 판결은 사퇴를 거부하는 기관장들의 보호막이 되고 있다. 버티면 어쩔 도리가 없음을 알게 된 기관장들은 임기를 채우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 정해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 등은 여권의 미움을 받는 상징적 인물들이 됐다. 그런데 법에 보장된 임기를 떠나,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굳이 임기를 채우겠다는 기관장들의 모습도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국정 철학을 함께하기 어려운 정부 아래에서 결국 하는 일 없이 밥그릇만 쥐고 있는 모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소신이 무엇이든, 새 부대에는 새 술이 담기는 것이 깔끔하고 보기 좋다. 그렇게 해서 임기를 채우는 것이 어떤 공적인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알기 어렵다.

 

치졸한 방법으로 사퇴를 압박하는 여권도, 자기들도 그래놓고 말을 바꾸는 야당도,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당사자들도, 모두가 진흙탕에서 더러운 싸움을 하고 있을 뿐이다. 모두가 패자인 싸움이다. 그런데도 이런 상황이 방치되는 것은 여야 정치권의 무능이다. 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무렵 공공기관장들의 임기도 종료되도록 법을 만들고, 그런 합의 위에서 문재인 정부 때 임명된 기관장들은 일괄 사퇴하도록 민주당이 설득하는 대타협을 하면 된다. 이미 국회에는 공공기관장들의 임기를 대통령 임기와 함께하는 법안이 민주당 의원들에 의해 발의돼 있다. 그러니 여야가 신사협정 위에서 법을 만들고 정치적 노력을 하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싸우지만 말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다.

[논단] 유창선 시사평론가 2022.10.21.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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