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 문화선임기자
문득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 소동파의 시가 생각났다.
"노승은 이미 죽어 사리탑이 새로 섰고/ 벽은 허물어져 글씨는 간 데 없네/ 기구했던 지난날을 아직 기억하는가/ 길이 멀어 우리는 지칠 대로 지치고/ 나귀도 절뚝이며 울어댔었지."
혹시 폐사지에 가 본 적이 있는가. 한때는 융성했었으나 이제는 그 흔적만 남아 한때의 영광을 증거하고 있는 곳 말이다. 기둥만 남은 건물터, 덩그러니 남아 있는 부도탑, 쓰러져 있는 석상 등이 뭐라 설명하기 힘든 허무를 전해준다.
중국 북송을 대표하는 시인 소동파는 1037년 중국 쓰촨성 메이산에서 출생했다. 소식(蘇軾)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22세 때 과거시험에서 진사에 급제했다. 첫 관직으로 궁정의 사무를 담당했는데 이때 급진적이던 왕안석(王安石)과 정치적 의견 차이로 대립하게 된다. 이후 실세였던 왕안석에게 밀려 한직을 떠돈다. 지방을 떠도는 삶이 고달프기는 했지만 문학적 재능이 꽃을 피우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소동파는 65세로 장쑤성 창저우(常州)에서 사망할 때까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유배생활로 보낸다.
"하루살이 목숨을 하늘과 땅에 맡기니/ 아득히 푸른 바다에 뜬 좁쌀 한 알 같구나/ 나의 생이 순간임을 슬퍼하고/ 장강(長江)의 무궁함을 부러워하노라/ 하늘을 나는 신선 만나 즐겁게 노닐고/ 밝은 달 안고서 오래 살다 가고 싶지만/ 얻을 수 없음을 아니/ 여운을 슬픈 바람에 실려 보내리."('전(前)적벽부' 부분)
'적벽부'는 황저우에서 유배 시절에 쓴 시로 가을에 지은 것을 '전(前)적벽부', 겨울에 지은 것을 '후(後)적벽부'라 한다.
유배지를 떠돌던 소동파는 일찍이 명예와 부로 대변되는 현실의 허망함을 깨우쳤다. 폐허의 시학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가 노래한 폐허는 세상만물의 본성이다. 어찌 영원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세상이 어차피 폐허를 향해 간다는 것을 너무나 일찍 알아버린 소동파. 그가 폐허를 일찍 알아버린 덕에 우리는 그의 '미학'을 즐길 수 있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쓸쓸하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나의 모든 아픔은 나 혼자 치러야 하는 전쟁이다. 생로병사 번뇌를 넘어서기 위해 출가한 석가모니가 위대한 이유다. 그는 고독이라는 자기의 우주 안에서 평안을 찾은 것이다.
생로병사와 고독은 인류에게 선물이기도 하다. 만약 인생이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어떤 종교도, 어떤 철학도, 어떤 문학작품도 예술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소동파의 시들을 찾아 읽으며 존재의 고독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사실 가장 멋있는 사람은 '잘 혼자인 사람'이다. 집단 속에서 자신의 좌표를 찾는 사람들은 집단이 사라지면 좌표를 잃는다. 하지만 잘 혼자인 사람은 그렇지 않다. 자기가 곧 좌표다. 존재하는 일 그것은 쓸쓸함과 친해지는 일이다.
매일경제 허연 문화선임기자(praha@mk.co.kr) 22.0709 오피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