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조직에든 꿈과 비전을 갖고 조직의 미래를 걱정하며, 조직의 개혁과 발전을 위해, 스스로 사명감에 불을 붙이고 타오르는 선도자(Innovator)가 3-5% 정도는 된다. 그리고 90%는 남이 불을 붙여줘야 타오른다. 이들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속도에 따라 빠른 수용자, 중간 수용자, 늦은 수용자로 나눠 볼 수 있다.
문제는 남이 불을 붙여줘도 타오르지 않거나, 모처럼 붙은 남의 불마저 꺼버리는 반대자다. 조직 구성원의 7-15%에 해당하는 이들은 새로운 생각이나 변화가 이미 수용되어 실현되고 있는데도 여전히 `아, 옛날이여!'를 회상하며 반대만 한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변화에 대처하는 유형에는 네 가지 타입이 있다.
첫째는 저항을 하는 타입으로 이러한 개인이나 조직은 도태되고 만다.
둘째는 변화에 대처하는 타입이다. 이 경우는 간신히 생존할 수 있다.
셋째는 변화에 적응하는 타입이다. 이 경우는 현상 유지에 그친다.
넷째는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타입이다. 이 경우는 생존에 현상 유지는 물론이고 발전이 가능하다.
어느 조직에든 진보적인 성향과 보수적인 성향의 구성원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새로운 생각이나 변화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빨리 받아들이느냐로 진보파와 보수파를 구분한다.
물론 변화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변화란 어떤 사람에게는 위기가 될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찬스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 자체를 무조건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찬스가 오지 않는다. 위기가 올 뿐이다.
지구 환경이 변할 때, 거기에 적응하지 못했던 공룡이 멸종했듯이, 무엇이든 환경이 바뀔 때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 교회를 둘러싼 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애써 변화를 외면하거나, 변화에 대해 의연하게 저항하며 버티는 것이 신앙인의 절개인 것으로 착각한다면 교회는 공룡의 운영을 맞을 수밖에 없다.
본질도 아닌 수단을 붙잡고 절대 불변만을 외치는 건 보수주의가 아니다. 그럼 뭔가? 아무것도 아니다.
변화 수용을 가장 심하게 거부하는 계층은 언제나 기득권자다. 가진 것을 잃게 될까봐 저항하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 기득권자가 누구일지 생각해 보자.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 내가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고 새로운 생각에 귀를 기울이고 변화에 주목하자. 그래야만 새로워질 수 있다. 늘 그래 왔다는 것, 전통이라는 것을 진리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변화 속에서 반드시 발전으로 인도하는 틈새가 있다. 새로운 시각으로 그것을 찾아보자.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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